포스트모던 시대의 미술
1970년대 말경부터의 미술을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이라고 부르고 있다. 최근의 미술이 모더니즘의 신화를 해체하고자 하는 점에서 담론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에 상응하는 측면이 많은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새로운 양식의 발명보다 이전 것에 대한 반성에 몰두하고 있는 근래의 미술에서는 실천이 곧 담론인 셈이다.
=>작가의 죽음; 원본에서 차용으로
포스트모던 시대의 미술가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의심의 눈길을 보내기 시작한 표적은 작품과 작가의 절대적인 관계이다. 미술가들은 롤랑 바르트( Roland Barthes)가 선언한 ‘저자의 죽음’, 더 정확히 말하면 ‘원본적 의미’를 창시한 자로서의 미술가 개념의 종말을 시연하기 위하여 이미지의 표변을 주목하게 되었다. 이제 이미지는 작가의 깊은 내부로부터 창조된 것이라기보다 주변에서 표류하는 선행목록들 중에서 차용한 것이 되었다. 근래에 와서 사진이나 영상과 같은 복제 이미지가 각광을 받게 된 것도 이러한 변화의 증거이다. 이제 미술작품은 더 이상 이상적인 질서나 숭고함 같은 원작자의 메타담론을 담아낸 유일한 창조물이 아니라 시장에서 유통되면서 서로를 창조하는 이미지 정보가 되었다.
제프쿤스(Jeff koons, 1955~)의 진공청소기와 하임 스타인바흐(Haim steinbach, 1941~)의 물품목록에 이르면 작품은 문자 그대로 상품이 되며 예술작업은 일종의 쇼핑과 같은 것이 된다. 물건들과 진열대는 모두 상품으로서의 예술품과 예술품으로서의 상품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장르의 와해; 순종에서 혼성으로
차용의 행위는 매체간의 혼합과 확산을 가져오는 점에서 모더니즘의 또 하나의 신화인 매체의 순수성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기도 하다. 사진, 인쇄, 복사. 전광판, 비디오, 설치, 퍼포먼스, 영화 등의 혼용은 이제 익숙한 것이 되었다. 미술가들은 ‘마이클프리드’가 그렇게도 유려하였던 개별 예술들 사이를 탐구하게 된 것 이다. 크림프가 지적하였듯이, 비디오와 퍼포먼스는 미니멀리즘에 내재되었던 ‘연극(theater)'의 외현이며 전통적 그림을 무대에 올린 것이다.
나아가 예술 밖의 공간으로까지 연장된 차용행위를 통하여 이 시대의 미술가들은 장르간의 교배뿐 아니라 대중문화의 이종교배에까지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차용과 매체 간 교배의 범람은 ‘일관성’에 대한 모더니스트적 신념도 와해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제 예술가들은 계몽주의 이래 축적되어 온 대서사에 종말이 왔다는 포스트 모던적인 조건을 직시하고 있는 것이며, ‘장-프랑수아 라요타르’가 제안한 대로, 전문거의 호몰로지(homology)보다 창조저의 패럴러지(paralagy)를 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미술의 목표는 더 이상 혁신에 있지 않다. 원본성의 신화가 허물어지면서 모더니즘의 추진력이 외어온 ‘새로움의 충격’도 무용한 것이 되었다. 높은 장벽으로 외부와 차단된 채 수직적 발전논리에 따라 순수를 향해 열리게 되었다. ‘초월적 역사주의’의 예술적 대응물이라는 레타노 포지올리(Renato Poggioli)식의 아방가르드는 의미를 잃게 되었다, 진보나 전위 같은 어휘는 퇴색되었으며 여기저기서 따온 것들을 모아놓은 절충주의와 매너리즘이 수치가 아니게 되었다. 단지 이전과 다른 점은 그것이 잘못된 신화를 깨기 위하여 표면화되고 전략화 되었다는 점이다.
=>이야기의 부활: 형식에서 내용으로
저자가 없어진 시대의 미술은 보는 형태가 아닌 읽는 텍스트가 된다. 미술가는 예술 오브제의 제작자가 아니라 기호의 조작자가 되며, 관람자는 수동적인 관조자에서 능동적인 독해 자가 된다. 형식이 사라진 공간에서 언어가 탄생하게 되는 것 이다. 문화의 전유물이었던 언어가 예술의 전 영역에 산포되고 있다.
이시대의 미술가들은 개인적, 일시적 파편들을 초월적 총체로 구성하지 않는다. 이들은 양식의 발명에 강박적으로 집착하기보다 집단의 역사 개인적 감수성을 서술하고 표현하고자 한다. 이제 미술가들은 모더니스트들의 금기였던 과거로 돌아가기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도 가지지 않게 되었으며, 오히려 지나간 양식이나 주제, 기법 등을 '네오(neo-)'라는 접두사와 함께 되살려내어 이야기 구성에 이용하고 있다.
=> 차이의 노출; 중심에서 주변으로
중심 지향적 제도의 문제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주체는 누구보다도 그제도의 희생자인 여성, 유색인, 동성애자들일 것이다. 따라서 그런 주변인들이 자신의 배경을 반영하는 작업하는 예술에 데뷔하는 것은 그 차이의 구조를 노출시키고 나아가 그것에 대해비판의식을 상기시키는 계기가 된다. ‘핼포스터(Hal foster)’의 의견대로 미술계에 ‘타자’의 예술을 ‘제시’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 제스처인 것이다.
포스트 모던시대의 미술가들은 기존의 믿음을 해체하는 일에 몰두한 나머지, 예술의‘가치’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관임이 없거나 심지어 그것을 부정하는 것으로까지 모인다. 그러나 의식의 대전환이 예술의 영영ㄱ에서 ‘가치’라는 개념을 사멸시키는 지점에까지는 이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예술적 ‘가치’에의 신앙은 모더니스트들의 것만이 아닌 보편적인 신념이며, 따라서 그것마저 버린다면 이미 예술이라는 말 자체의 존재를 잃는 셈이다. 따라서 포스트 모더니스트들도 결국은 예술주의자 즉 아트-이스트(art-ist)들인 것이다. 나아가 ‘가치’의 척도는 어떤 방식으로 역사로부터 유쾌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을 최신판으로 개정된 모더니즘의 또 다른 얼굴로 보는 것도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혼성모방을 어떻게 볼 것인가
혼성모방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낯익은 명화나 대중적 이미지들 작품에 부분적으로 차용, 인용, 번안, 각색하는 창작 방법론이다. 쉽게 말하면 남의 작품에서 이미지를 떠오르되, 독창적으로 짜깁기(혼성)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남의 작품을 자기 것처럼 속이는 표절이나 도용과는 명백히 다르다.
의식의 분열과 담론의 파편화 양상을 보이고 있는 현대의 문화구조속에서 나타난 혼성모방은, 동시대의 문화환경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끈다.
미디어 사회, 탈 후기산업사회, 정보화 사회, 관련된 사회 등으로 묘사되는 현대의 ‘포스트 모던’한 조건은 문화예술의 양태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침으로써, 급기야는 예술의 창작이나 감상의 방법과 구조를 변질시키고 있다.
=>창조력의 고갈, 새로운 방법은?
창조력의 고갈과 직결되는 이와 같은 현상은 예술에 더 이상 새로움은 존재치 않는다는 일종의 허무주의적 사고의 결과이다. “예술에 관한 한 이제는 아무것도 자명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자명해졌다”는 아드르노의 탄식은, 바로 이처럼 예술의 자유성의 맥락에서 벗어나 고급예술과 대중 예술 간의 경계마저 무너져버린 상태. 현대예술에서 아방가르드 정신이 퇴조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한때는 사회에 대한 혹독한 비판자요, 지진계의 역할을 감당했던 전위작가들 (이를테면 다다(Dada)시대의 예술가들)은 이제 더 이상의 실험을 그치고, 선대부터 비축된 문화적 자산을 재탕하거나, 과거의 실험적 열기에 대한 향수에 젖어 실험 그 자체를 패러디함으로써 부유한 자본가들과 달콤한 밀월을 즐기고 있다. 예술적, 역사적 상황이 서구와는 다른 한국 미술의 상황을 비교 검토해 봄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바람직한 우리미술의 좌표와 문화적 전망을 밝혀보자는 노력과도 직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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